LEE SI HYUN
OCT 10 - 3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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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되고 빈 풍경의 힘

좋은 그림이란 어떤 것일까? 뚜렷한 정답도 없고 어쩌면 별 효용도 없는 이 질문이 가끔씩 떠오를 때가 있다. 물론 그 답은 예술가와 관객 저마다 다를 것이고, 답을 찾지 못한 사람도, 여러 개의 답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는 “훌륭한 예술은 예술가의 내면의 삶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고, 이 내면의 삶으로부터 세계에 대한 그의 개인적 시각이 비롯된다”, 그리고 “내 그림의 목표는 항상 자연에 대한 나의 가장 내밀한 인상을 가장 정확히 옮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 호퍼에게 좋은 그림은 작가의 개인적 삶에서 느끼는 내밀한 인상에 지극히 충실한 그림이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호퍼가 가장 ‘미국적인 장면’을 그린 화가로 칭송받는 것은 단지 당시 사회적 현실과 도시 생활의 단면을 객관적으로 잘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환경 안에서 개인적으로 받아들인 내밀한 인상에 충실한 장면을 그림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 안에서 자신의 것과 겹쳐지는 감성과 정서를 발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시현은 ‘좋은 그림’에 대한 대답에 있어서 호퍼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화가라는 생각이 든다.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둘러싼 주변 환경의 단면을 화폭에 옮기지만, 그것은 그녀의 삶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장면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활 속에서 늘 마주하는 지극히 평범한 삶의 단면인 것이다. 특히 그것은 너무도 평범하여 그녀의 그림 안에 제시되기 이전에는 흔히 주목받지 못한 채 흘려보내고 마는 장면이며, 언제나 볼 수 있기에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장면이다. 장면이 시간과 공간 모두를 포함한다고 할 때, 이시현의 그림 속 장면은 특별한 사건들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는 일상의 공간이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 삶의 대부분은 이처럼 평범한 공간 안에서 의식하지 못한 채 흘려보내는 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이시현의 그림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별 일 없는’ 삶을 드러내어 자각하게 한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독특하고 고유한 장면을 구성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면, 그녀는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극히 일상적인 시공간을 우리 앞에 맞닥뜨리게 하는 것이다. 작가 스스로 말하듯 그것은 ‘정지되고’ ‘빈’ 풍경에 다름 아니다.

따분한 오후, 한낮의 풍경
창 밖으로 보이는 규칙적인 아파트의 모습.
햇빛이 떨어지는 각도, 그로 인한 그림자의 길이만이
시간의 변화를 나타낼 뿐
여전히 ‘정지된 풍경’이다.

늦은 밤, 집안의 모습.
식구들 대부분이 잠이 들 시간
내부에선 비교적 자유로운 관찰자가 되어
방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부엌으로 또 부엌에서 다른 방으로.
인기척 소리에 놀라 불을 켜고
아무도 없음을 안 그제야 ‘빈 풍경’에 안심한다.

-2005년 작가의 작업노트 중에서
작가의 작업 초기부터 현재까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재는 바로 ‘창’이다. 우리는 모두 창을 통해 풍경을 보지만, 창을 통해 바라본 풍경은 저마다 다르다. 이시현이 창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은 대체로 그렇게 ‘정지’되고 ‘비어’ 있다. 처음에 작가는 아파트 자신의 방 창문 너머를 그리기 시작했다. 낮에는 창을 가린 커튼과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 베란다에 걸린 빨래들을 그렸고 밤이 되면 암흑 속에서 환히 빛나는 창과 그 빛나는 창을 캔버스 삼아 내려앉은 나뭇가지의 그림자 혹은 빨래를 걷어간 뒤 베란다에 걸린 빈 옷걸이를 그렸다. 멀리 보이는 여러 개의 창을 그리기도 하고 하나의 창만을 그리기도 했다. 때로는 문득 깨달은 듯 지금 자신이 내다보고 있는 방의 창문 모서리를 그리기도 했다. 다리를 다쳐 꼼짝없이 방 안에 갇혀 있으면서 하루 종일 창밖을 관찰하는 히치콕 영화 <이창(Rear Window)>의 주인공 제프처럼 그녀는 마치 방 안에서 내다보는 세계가 전부인 양 이쪽 창과 저쪽 창을 그렸다. 그러나 제프가 창 너머 다른 집 사람들과 그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훔쳐보는 데 집중했다면, 그녀는 사람들이 창에서 모습을 감춘 상태의 창, 즉 무슨 일이 일어난 뒤의 창이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창을 그려왔다. 그리고 그러한 작가 특유의 ‘빈’ 풍경은 집을 나와 외부로 향했다.
바깥 풍경을 그릴 때조차 작가는 대부분 교통수단 내부에서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다. 예컨대 도로나 주차장에서 버스나 자동차를 탄 채로 바깥의 다른 버스나 자동차를 바라본다거나, KTX 안에서 저 멀리 지나가는 또 다른 KTX가 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이륙 전의 비행기 안에서 승강장이나 활주로의 다른 비행기의 모습을 바라본다. 이러한 탈 것의 풍경 역시 이전의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창을 통해 바라본 세상인 것이다. 그녀에게 창은 단지 소재일 뿐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환경의 일부이자 지금 바라보는 그 장면을 투과시키고 틀 지우는 카메라의 렌즈와 같은 매개체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그녀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일은 아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이라는 것 대부분이 사실상 건물이나 교통수단 안에서 창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그러한 행위는 시간의 압박을 받지 않고 홀로 있는 시간에 이루어진다.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가 생산이나 노동과 무관하게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고 혼자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아침에 일어나서 몇 분, 집에 돌아와 잠들기 전까지의 몇 시간, 일터로 향하거나 일터에서 돌아오는 이동 시간이 전부이다. 그러므로 이시현이 창을 통해 바라본 ‘정지되고’ ‘빈’ 풍경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홀로 있는 시간’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즉 그녀는 우리 스스로 주목하지 않는 우리 자신만의 시간을 화폭에 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풍경들은 철저히 작가의 일상을 반영하고 축적된 시간을 드러낸다. 비교적 단조로운 그녀의 삶의 반경을 입증하듯 작업공간이나 생활공간의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과 이동 중 교통수단의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소재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부산으로 이사한 후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KTX나 비행기 같은 교통수단의 소재가 추가되면서 탈 것과 함께 하는 풍경이 본격화되었다. 또 삶의 환경이 바뀌고 그림에 나타나는 주변 풍경도 달라졌다. 그러나 그녀의 그림 속 장면은 어느 것 하나 결코 우연히 순간적으로 결정된 것이 없다. 수없이 많이 보고 느끼면서 그녀의 눈과 가슴에 들어 와 박힌 장면만이 그림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 ‘똑딱이’ 카메라를 늘 소지하는 그녀는 어떠한 장면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으로 느껴지면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동일한 장소의 그 장면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사진으로 찍은 뒤 인화하여 보고 또 본다. 그리고 나서야 여러 시간대의 풍경이 중첩된 한 장소의 풍경이 그림으로 옮겨지기 시작한다. 사진을 기반으로 하지만 ‘사진처럼’ 그리는 것과는 거리가 먼 셈이다. 또한 회화작품으로 그리기 전 하드보드지에 동일 장면을 거칠게 그리는 과정을 거친다. 이시현의 한 장의 그림에는 이처럼 많은 시간이 축적된다. 분명 특정한 장소를 그린 것인데 장소성이 아닌 시간성이 더 부각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시간성이 아니라 ‘축적된’ 시간성이다. 늘 다니는 장소, 즉 여러 차례 반복하여 바라본 공간이기에 이미 장소는 상수가 되고 그 안에 시간이 변수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 변수 역시 여러 차례 계산이 반복될 뿐 양적인 오차 범위는 크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빛의 변화와 순간을 화면에 포착하고자 시간대를 달리해 루앙 성당을 그린 모네보다는, 빛과 시간에 관계없이 그 대상 고유의 성질과 그 느낌을 표현하고자 여러 차례 생빅투와르 산을 그린 세잔에 가까울 것이다.
일찍이 독일의 비평가 레싱은 『라오콘』(1766)에서 회화와 문학의 근본적인 매체의 차이를 주장하며 회화에게 공간성을 부여하고 시간성을 배제시켰다. 그러나 세잔은 물론 오늘날 많은 화가들에게서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시간성을 발견한다. 이시현의 회화 역시 그러하다. 그녀의 그림에는 과정상의 ‘축적된’ 시간성과 더불어 화면 자체에서의 시간성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회화 표면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속도감으로 공간과 함께 부각되는 시간성이다. 그녀의 그림에는 유독 가로 포맷, 특히 사진을 기반으로 하는 이유에서인지 4:3 혹은 16:9의 비율과 그 변형이 많다. 따라서 그림의 전체적 구도가 자연스럽게 수평을 이룬다. 그와 더불어 작가는 특정한 대상이 위치한 장소의 나머지 공간을 대체로 여백으로 남긴다. 이 때 작가 특유의 가로 붓질 자국이 이러한 수평구도의 공간의 여백을 채움으로써 속도감이 부여된다. 그리고 자동차, 비행기, 기차 등 교통수단의 소재와 만날 때 그 효과는 배가된다. 심지어 동일한 형태의 화면을 세로로 길게 놓고 그릴 때조차 여전히 유지되는 수평구도와 공간의 여백, 가로 붓질은 무언가 지나가고 난 듯한 속도의 여운을 남긴다. 특히 작가가 이제까지 주로 사용해 온 광목천과 달리 이번 전시에 새롭게 시도한 캔버스천은 상대적으로 스밈이 덜 해 붓 자국이 더욱 두드러짐으로써 교통수단의 소재와 함께 속도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다. 따라서 이시현의 그림에서 회화의 매체성은 - 시간성이 아닌 - 물감의 붓 자국을 통한 물질성으로서 확인되는 셈이다.
이렇듯 이시현의 ‘정지되고’ ‘빈’ 풍경은 역설적으로 시간성이 부각되는 풍경이다. 하지만 그녀가 비어 있는 그 공간을 시간으로 채우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이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정지된 것 같지만 여전히 흐르고 있는 시간과 비어있는 것 같지만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간, 즉 평소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지만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공간이 이시현의 그림에는 담겨있다. 그것은 마치 인물이 생략된 호퍼의 그림처럼 동시대의 감성과 정서를 공유케 한다. 다수의 호퍼 그림에 창이 등장하고 그 창으로 낮과 밤의 빛이 투과하며, 기차를 비롯한 교통수단이 흔히 배경이 되는 것 역시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세부적인 묘사와 화풍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이 몸담고 있는 도시 환경을 관찰하고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본 일상의 시공간을 그림에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여전히 회화가 힘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이처럼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표현한 화가 개인의 삶에 대한 내밀한 인상을, 보는 사람이 진심으로 공감하는 그 풍요로운 순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좋은 그림’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시현의 ‘정지되고 빈 풍경’이 지닌 힘 역시 동일한 답을 공유함에 틀림없다.

미술비평 | 신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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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www.brainyquote.com/quotes/authors/e/edward_hopper.html